Dr. ato 닥터 아토

닥터 아토 SPF 30

실내에 있을 때가 많아서 자외선지수가 낮은 것을 찾던 중 베이비용품을 골랐다.
보통 45~50인데 자외선지수가 높은건 피부에 안좋다고 들었기에.
약간 바세린 로션 바르는 기분인데 향도 부담없고 끈적이지도 않고 맘에 든다.
아기용품을 성인이 쓰면 안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많이 쓰고 있는데 저자극이라 피부에는 좋은거 같다.






by 블루아이즈 | 2015/06/12 17:50 | 트랙백 | 덧글(0)

구한말 전염병 대처는 어땠을까: 천연두(마마) 대처법

by 블루아이즈 | 2015/06/12 13:58 | 트랙백 | 덧글(3)

14. 죽은 놈도 살려내고, 핏덩이도 장정으로: 조선시대 병역비리

 

 
 
조선시대 병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것이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이 있습니다. 황구첨정이란 아직 군역으로 끌려가지 않을 어린 아이에게 군역을 물려 세금을 추징하는 것이고(황구黃口는 아직 성인 장정이 되지 않은 어린이를 말합니다) 백골징포는 이미 죽은 사람을 죽지 않은 것으로 조작해 군포를 물리는 것이고, 족징과 인징이란 군역을 물지 않기 위해 도망간 사람의 군역이나 세금을 그 친척이나 이웃에게 물리는 것입니다.

 
사실 대표적인 것만 해서 저렇지 자세하게 따지고 들면 더 많이 있습니다. 세금 걷어내는 방법이란 참 다양하거든요. 백골징포만 해도 60세가 넘어 군역이 면제된 사람을 장부를 조작해 그보다 적은 나이로 만들어 군포를 걷는 강년채(降年債)가 있고, 아예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생전 체납한 세금이 있다며 거둬가는 물고채(物故債)도 있습니다. 이러니 후기 삼정의 문란으로 난리가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죠.
 


원래 조선에서는 16세부터 60세까지 남자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지게 했는데 이 연령대의 남자들이 죄다 군대를 가면 농사는 누가 짓나요? 그래서 군사 1명에 보인 2~3명을 둬서 그 2~3명이 병사 1명을 먹여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러기 위한 것이 바로 군포
였지요. 이것은 일 년에 베 2(초기에는 1)로 이것만이라면 그다지 사는 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요.

문제는 당시 군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데다가(군대에 의무병이 생긴 건 근대 이후, 그전에는 의사 없는 곳에서는 그냥 죽어야 했고, 수군은 병들면 그대로 바다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수군이나 시위 등 군기가 센 병종의 경우 멀쩡하게 갔다가 귀신이나 불구가 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에서 연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장기요양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군대 빠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면 이상한 거죠. 그래서 평시에 남는 잉여를 국가 재정으로 바꾸기 위한 방군수포나 대역납포 같은 제도를 악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난리도 아니게 된 거죠.

 
돈을 바치면 군역이 면제되니 기술이 필요한 병종 또한 이런 방법으로 헐역(歇役)을 받았습니다. 헐역이란 나이가 차서 병역면제가 되는 것인데, 원래는 불가능했습니다만 지방 수령들이 군역을 작성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아전들이 돈을 받고 빼버리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다 보니 군대의 질은 땅바닥을 기게 되어버린 겁니다. 거기다 단순히 군대가 약해진 정도라면 문제가 아닌데, 조선시대 관리를 보좌하던 아전들은 공식적인 급료가 없었기에 세금 받은 거에서 좀 떼어다가 자기가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떼어먹다 보면 사람 욕심이 더 크게 떼어먹고 싶어지죠.
 
그래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떼어먹다 보니 정작 중앙에 바칠 세금이 없는 겁니다. 나라에서 조사한 군역자는 대충 나오는데 그보다 더 떼어먹었으니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면 어쩔까요? 덜 떼어먹을까요? 아니죠. 그래서 나온 게 죽은 놈도 살려보고 핏덩이도 장정으로 바꿔버리는 기술입니다. 자고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니까요. 이러다 보니 그 참상은 말로 못할 정도여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갔을 때 군포와 관련된 비리를 직접 목격하고 그와 관련한 비극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제목의 시로 남겼습니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哭向懸門呼穹蒼[곡향현문호궁창]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부복상가유]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舅喪已縞兒未조[구상기호아미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薄言往소虎守혼[박언왕소호수혼]
里正咆哮牛去조[이정포효우거조]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민건去勢良亦慽[민건거세량역척]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건도녀]
선馬분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況乃生民恩繼序[황내생민은계서]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진관현]
粒米寸帛無所捐[입미정백무소연]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客窓重誦시鳩篇[객창중송시구편]
 
내용을 살펴보자면 웬 젊은 아낙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내용을 보니 시아버지는 삼년상도 벌써 지났고, 아이는 아직 배냇저고리도 못 벗은 간난쟁이인데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이까지 죄다 군적에 오른 겁니다. 이러니 세금 부담을 어떻게 해요? 그래서 억울하다고 관청에 가니 문 앞에서 하소연도 못 해보고 쫓겨나고 세금 걷어가는 이정은 농사지을 소까지 끌고 가버립니다.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편이 방에 들어가 자기 양물을 자기 손으로 잘라낸 겁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이 난리를 겪는다.”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러니 아낙이 울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런 비리의 고리는 조선 사회를 아주 꽁꽁 묶어놔 쉽게 처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양반들은 지방관료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받는 게 일상이었고, 아전은 아전대로 세금에서 자기 먹을 것을 떼다 보니 얼마나 해먹을지는 그야말로 자기 생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결국 당하는 건 순리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죠. 율곡선생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는데, 사실 이건 임진왜란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군역에 대한 폐단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17 16 1 22 2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없는 군대를 늘리거나 만든다기보다, 있는 군대를 정비하거나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자는 겁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워낙에 군역이 제멋대로이다 보니 백성은 백성대로 고달프고, 군대는 군대대로 곪아 나갔으니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십만양병설은 기득권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죠. 떼먹는 건 아전이라면서 왜 양반들이 반대하냐고요? 먹으면 혼자 먹나요?
 
병역 회피는 군포 대신 뇌물 먹이고 빠져나오는 것도 있지만 학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향교인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가면 군대가 연기되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로 성균관이나 향교의 학생들은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 좀 있는 양인들이 이 향교에 이름을 넣어 병역을 면제받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조선시대에 교육받는 것은 천민만 아니면 가능했으니 이런 편법도 가능했던 거죠. 덕분에 인조 때에만도 향교에 교생이 공식적으로 4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이걸 해결하기 위해 낙강충군제를 마련해 시험을 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군대에 보내는 방법을 모색했지요. 그러나 이것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애시당초 양반들은 시험을 보나 안 보나 군역에서 면제가 되는 것이었고, 양반이 아니라도 향교에 다닐 사람이면 부유하다는 건데, 수령이나 교관에게 뇌물을 주고 시험을 회피하는 사례가 나왔거든요. 심지어 정부에서 조차 납율면강제(納粟免講制)라는 이름으로 돈을 내고 시험을 면제받는 제도를 재정 확보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병역비리와 그로 인한 폐단들은 결국 조선을 갉아먹어 조선 멸망에 부채질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도 이런 폐단이 내려오는 듯해서 어쩐지 조금 씁쓸해집니다.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orderclick=JAc&sntn_id=7475&Kc=KDBLCNbooknews

by 블루아이즈 | 2013/08/17 20:44 | 트랙백 | 덧글(0)

13. 원균이 정말 그랬어?: 원균에 대한 오해

한때 원균론이나 원균 명장론이 나왔었지요. 독재시절 군부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 이순신 장군을 일부러 띄운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원균을 깔아뭉갰다는 말부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내세우며 원균은 사실 그렇지 않았다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들이 있었죠.

원균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80년대 이정일 교수의 원균론이 발표되고 나서부터인데 그 이후로 소설 등에서 원균맹장화나 이순신 깎아내리기 반대급부로 써먹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된 인식일 뿐이죠. 한 가지 측면만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니 마치 환단고기(또는 한단고기)를 추종하는 이들처럼 어처구니없는 곳까지 발전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 중에 하나입니다.

원균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선조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을 두둔한다거나 원균 사후 일등공신에 추서된 점 그리고 『원균행장록』의 내용에 근거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역사를 뒤튼 것이 명백한 경우입니다. 알다시피 원균 사후에 원균이 일등공신으로 추서된 것은 선조가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죠. 실제 임란 이후 공신목록을 보면 전장에서 싸운 장수들보다 내시들이 더 높이 추서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전란에서 싸운 장수들은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내시들은 왕의 옆에서 시중드는 쪽이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거죠.
아래는 임란 이후의 공신 목록입니다.
 
호성공신(扈聖功臣) : 선조의 피난 시 호종했던 공로
1등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이항복, 정곤수
2등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忠勤貞亮?節協策扈聖功臣): 신성군 이후, 정원군 이부, 이원익, 윤두수, 심우승, 이호민, 윤근수, 유성룡, 김응남, 이산보, 유근, 이충원, 홍진, 이괵, 유영경, 이유징, 박동량, 심대, 박숭원, 정희번, 이광정, 최흥원, 심충겸, 윤자신, 한연, 해훙군 이기, 순의군 이경온, 순령군 이경검, 신잡, 안황,구성
3등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 정탁, 이헌국, 유희림, 이유중, 임발영, 기효복, 최응숙, 최빈, 오정방, 이응순, 신수곤, 송강, 고희, 강곤, 이사공, 유조생, 양순민, 경종지, 최세준, 홍택
내시(內侍): 김기문, 최언준, 민희건, 김봉, 김양보, 안언봉, 박충경, 임우, 김응창, 정한기, 박춘성, 김예정, 김수원, 신응서, 신대용, 김새신, 조구수, 장자검, 백응범, 최윤영, 김준영, 정대길, 김계한, 박몽주, 이사공, 유조생, 양순민, 경종지. 이연록
의관(醫官): 허준, 이공기
이마(理馬): 김응수, 오치운, 전용, 이춘국, 오연, 이희령
86. 그중 내시:24명 이마:6명 의관:2명 별좌:2명 사알:2
 
선무공신(宣武功臣) : 전쟁에서 공을 세웠거나 후방지원에 대한 공로
1등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효충장의선무공신 (效忠仗義宣武功臣) :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18
 
청난공신 (淸難功臣) 임란 중 발생한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로
1등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공신 (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 홍가신
2등 분충출기적의청 공신 (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 박명현, 최호
3등 분충출기청난공신 (奮忠出氣淸難功臣): 신경행, 임득의
5
 
『원균행장록』이라는 서적은 아예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애초에 『원균행장록』은 영조시대 김간이 원균 후손들의 청탁을 받아 쓴 책입니다. 더더구나 원균 당시가 아니라 127년이나 지난 다음에 쓰인 것으로 내용 자체에 오류와 모순을 가진,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책이지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죠.
 


『원균행장록』에서 1592년 임란발발 당시 이순신에게 출전을 권한 장수는 어영담과 권준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송희립과 정운이죠. 또 당포해전 당시 원균이 적선 55척을 빼앗고 수급 103두를 거두었다고 했지만 당시 원균이 가진 배는 불과 4척이었고 - 알다시피 개전 초 원균은 싸워보지도 않고 함대를 버리고 도망간 무능력자입니다 - 당시 전체 조선군의 전과가 적선 7척 파괴 수급 95두입니다. 그러니까 조선군 전체가 벤 수급보다 자기 조상 수급이 더 많다는 거짓말을 하는 책인 것이죠.

또한 옥포해전 당시 원균은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 해전의 성과를 부풀려 원균의 공을 높이기 위해 실제 26척이 격침된 전과를 100여 척을 침몰시킨 것으로 과장합니다. 게다가 육지에서의 전적도 뻥으로 일관합니다. 『원균행장록』에서 원균은 ‘니탕개의 난’ 당시 공이 커서 부령부사의 자리에 올랐다고 했지만 정작 당시 부령부사는 장의현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원균행장록』은 후손들이 자기 조상을 위해 만들어놓은 판타지 소설이라는 말이지요. 그 외에는 원균을 옹호하는 것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나온 원균옹호론이 임란 당시와 조선을 통틀어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것 같군요.

유성룡의 경우 『징비록』에서는 원균을 음험하고 간사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선조 29년에 전쟁 중 선조 앞에서 원균이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며, 수전과 육전 모두에 능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근거로 삼기도 하죠. 그러나 그 선조 27년의 기록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며 원균을 용장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이순신을 비호하는 유성룡을 고깝게 보며 그의 발언을 의심하고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유성룡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선조의 비위를 맞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선조로서는 정치적으로 동인을 견제하려던 목적에 서인 쪽의 지지를 받는 원균을 높이 세우려 했고 이에 대한 갈등이 생겼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균을 비난하는 내용들은 어떨까요? 일단 『난중일기』는 빼고 이야기합시다. 『난중일기』가 이순신이 적은 일기라서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말이죠. 『난중일기』까지 포함하면 원균은 정말 기준 이하입니다. 빼도 마찬가지지만요. 일단 선조실록의 선조 25 6 28일 김성일의 장계를 봅시다. 그 장계에 의하면 원균은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전함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알다시피 조선에서 공문서 위조는 극형에 처할 중죄였기 때문에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더구나 뒷배경이 좋기로는 이순신보다 원균이죠. 원균은 서인 주류 라인을 타고 있었지만 이순신은 동인 계열이지만 아웃사이더라 그다지 힘이 없었거든요.

동시기 의병을 일으켰던 안방준은 그의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수급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고 심지어 다른 장수들에게 수급을 구걸까지 하니 병사들이 이를 두고 “한 숟갈씩 얻어온 밥이 온 공기보다 많다”라며 비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은봉전서』를 쓴 안방준은 원균과 무슨 원수라도 졌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오히려 원균과 안방준은 일가였습니다. 『은봉전서』에 보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친척인 안중홍을 찾아갑니다. 이 안봉준의 처가 바로 원씨 집안 사람이죠. 즉 처가 쪽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방문한 자리에서 원균은 높으면서 막중한 책무를 받은 것에 대한 걱정이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순신을 쫓아낸 것만이 기쁘다고 말합니다. 결국 안중홍은 원균을 두고 조괄과 기겁에 비유하며 졸렬하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원균은 수군이 아닐 때도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나서 원균과의 트러블로 이순신이 “나를 내치든지 원균을 내치든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하고 엄포를 놓자 조정에서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빼버리죠. 이것으로도 당시 원균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청병사로 간 자리에서도 원균은 비리를 저지릅니다
.
선조실록 28 8 15일자 기록에 사헌부에서 원균이 씨콩을 받고 복무 기간이 남은 병사들을 군에서 빼주는 병역비리를 저지르고 무리한 형벌로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였다고 파직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이때 철원부사 심원해와 봉산 군수 박응인도 함께 비리로 고발됩니다만 선조가 원균만 빼주죠. 왜냐하면 ‘시기 어려우니 그런 장수를 빼면 안 된다’라는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성은 둘째 치고 그가 정말로 용맹하기라도 한 장수였을까요? 그것도 천만의 말씀입니다. 임란이 끝난 지 2년째 되는 해 윤계선이라는 선비가 『달천몽유록』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그곳에 원균을 비웃는 글을 적습니다. 그는 그 소설에서 원균을 배가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라고 말하죠. 이것이 소설이라 믿을 수 없다면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원균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그는 ‘원균이 체구가 비대하고 식사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 3~4마리를 먹으며 평소에도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용맹하다 할 수 있을까요? 외모도 외모거니와 묘사된 상황이라면 제 몸 가누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맹한 무엇이 나올 수 있다면 정말 개가 웃을 일이죠. 그뿐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원균이 육전에서는 용맹한 장수로, 장군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 싸우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원균이 전공을 세웠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선조 22 1월과 7, 대신들이 북방에서 전공을 세운 장수들을 비변사에 추천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원균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순신은 세 번이나 추천이 되죠.
또한 원균이 종성부사로 있을 때 직급 테스트를 치렀는데 급수가 하급으로 나와 면직된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은 관리의 승진 및 평가가 엄격했는데 상중하로 나뉜 인사고과에서 하급 평가를 받으면 당상관은 파직, 그 이하는 인사고과 2회 기간 동안 승진불가였습니다. 즉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해 승진 시험에 떨어지고 면직까지 받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끈이 장난 아닌지라 불과 6개월 후에 전라좌수사로 승진되어버리죠.

그리고 위에서 말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보이자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간 사실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1593년 웅천포 해전에서 위기에 처한 아군 상선을 외면한 것도 기억할 만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난 다음 그가 통제사로 오르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부산에 진격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현실을 잘 본다는 둥 이순신 쪽이었던 권율이 방해를 놨다는 둥의 말을 하지만 실제 원균이 요구한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습니다.

원균은 수륙합동작전에 육군 30만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당시 조선에 30만의 병력을 만들 여력이 있었으면 전쟁이 그렇게까지 되지도 않았겠지요. 한마디로 되지도 않는 땡깡을 쓰며 전투를 미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전황과 국력을 평가할 기본적인 소양조차 없었다는 소리가 되는 것이지요. 전략을 못 짜면 잘 싸우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는 부산포 출정 중 가덕도에서 물을 구하러 보낸 아군 병사들이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도망쳐버립니다. 몇몇 사람들은 아군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도망치는 장수를 용맹한 장수라고 보는 이상한 눈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몽땅 말아먹고 사라져버린 사실은 원균을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는 명백한 사실들의 집합입니다.

살펴보면 당대 기록이나 후대 기록 어디에도 원균을 훌륭한 장수라고 표현한 부분은 없습니다. 심지어 왜란 내내 원균을 두둔하던 선조마저도 이순신 사후 더 이상 원균을 두둔하여 견제할 필요가 없어지자 “나는 그대를 버렸으나,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라는 말로 제문을 내려 위로합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시대가 만든 희생양으로 보는 부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도리어 지금의 모습을 보면 시대가 만든 희생양은 이순신입니다.

사람들이 원균맹장론 등으로 ‘어? 정말로 원균은 그런 거야?’라고 생각할까 두렵습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이런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원균명장론 따위가 설치는 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orderclick=JAc&sntn_id=7443&Kc=KDBLCNbooknews



by 블루아이즈 | 2013/08/16 21:22 | news | 트랙백 | 덧글(4)

12. 현대의 예방접종 불용론과 구한말 :천연두 대처법

 
2011년 봄이던가요. 한 블로그 사이트의 육아 밸리에서 이슈화되었던 예방접종 불용론에 대한 글들을 보다가 그들의 행위가 구한말의 행태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져서 이걸 한 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한말 때는 인구는 증가하는데 국가의 행정력은 미약하고 거기다 서구의 여러 가지 사상과 문물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엄청난 혼란을 겪던 시절이죠. 그런 만큼 전염병도 크게 돌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역시 예전에는 호환, 마마… 요즘 아이들은 불법 불량 비디오… 요즘에는 비디오가 잘 안 나오니 익숙하지 않을 것 같네요.
 
아무튼 거기에 나오는 마마라는 것, 그러니까 천연두가 있지요. 이 말은 원래 별성마마에서 마마로 줄었는데 이 천연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걸리면 다수가 죽어나갔습니다.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라서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죽은 사례도 있지요. 천연두가 창궐하면 민간에서는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그 무당들은 귀신에게 바친다며 돈과 음식 꾸러미가 든 자루를 끌어 모았죠.
 

 
다른 방법으로는 먼저 천연두에 걸린 아이의 딱지를 모아서 봉투에 담아뒀다가 절에 가져가 태우면서 자식의 생존에 대해 감사하거나 다른 아이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방법이 있었죠. 또 가시가 효험이 있다고 해서 집 처마 위나 대문 위쪽에 올려놓고 마마신이 들어오지 않도록 기원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효과가 있을 리가 없죠. 1903년 서울에 천연두가 퍼졌을 때 왕실에까지 천연두가 퍼져서,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 왕실 자체의 출입을 폐쇄하고 용하다는 무당을 궁궐 내로 불러다가 굿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러니 외국인도 별반 다를 게 없어서 한성전기회사에서 일하는 잉글리시라는 사람의 아내는 남편이 출장 나가 있는 사이에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지인에 의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이로 인해 몰골이 처참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윌터 존스라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는 고베에서 아내를 종기 때문에 잃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천연두에 걸려 아무것도 못해보고 한 달 뒤에 사망했지요.
 
이 천연두가 굿 이외에는 아주 방법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1886년 알렌 공사가 작성한 자료에는 중국식으로 환자의 고름에서 빼낸 농포를 접종해서 전근대적인 예방접종을 하기도 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소년은 왼쪽 콧구멍에 소녀는 오른쪽 콧구멍에 놓았다고 하는군요. 보통 이렇게 접종한 아이들은 60~70% 정도 되는데 이 아이들의 생존율은 의외로 높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접종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1%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 외국인이 들어오면서 서양의 의술도 같이 들어왔습니다. 1879년 지석영은 서구식 종두법을 우리에게 도입했지요.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서울에서 천연두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6만 명에 가까운 데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천연두는 큰 전염병이어서 이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서울의 인구를 14만 명 정도로 보는데 그중에 이미 이전에 병에 걸려 면역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걸렸지만 살아난 사람도 있을 것이니 6만 명의 사망자라 한다면 서울에 있는 사람 중 거의 대부분이 앓아누웠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요.
 

 
어쨌거나 지석영은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병원인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충주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했습니다만 무슨 자연주의 어쩌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때도 그러한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고 인지하는 터라 그 당시 사람들은 그 당시 수준에 맞게 이 주사를 맞으면 소의 영이 몸에 들어오게 된다고 생각하거나 소의 몸에서 추출한 것이기에 사람의 몸을 소로 변화시킨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으로 종두 주사를 거부했습니다. 이건 한국인뿐만 아니라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 종두법이 시작되었을 때, 악마가 사람을 소로 만들기 위한 수작이라는 소문도 퍼졌었죠.
 
이것 이외에도 퍼져 있는 미신들은 주로 소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소에게 병원균을 심어 병이 더 커져 있는 고름을 주사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고름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접종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이번에 퍼진 소문처럼 주사약에 페놀이 있다는 둥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고름이라는 것을 병의 근원으로 보고 과학적 원리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병인데 왜 병을 넣느냐는 자신의 상식 범위에서 생각을 한 것이었죠. 몇백 년이 지나도 이런 무지는 사라지지 않네요.
 
덕분에 지석영은 이런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사람 하나하나를 잡고 모두에게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설득은 효과를 거둬 많은 사람들이 접종을 받았고 병이 퍼졌을 때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석영은 이후 갑신정변에 의한 정치적 음모에 의해 귀양을 떠나기도 했습니다만 1890년대 천연두에 대한 포고령이 반포되고 1899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천연두 예방에 많은 힘을 기울일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천연두를 완벽하게 잡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1899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서양인 의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예방접종을 도입하려고 노력해왔다. 한국인들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스스로 이를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도 예방접종을 하지 못했다.
 
1899년 정도 되면 예방접종에 대한 인식도 어느 정도 퍼져 있는 상황이었고 성인의 경우에 간혹 스스로 예방접종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예방접종은 단 한 건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즉 예방접종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방접종에 의해 살아나고, 예방접종 이후 생존율이 늘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자기 자식에게 소 고름에서 나온 주사를 놓기에는 께름칙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 천연두는 세계보건기구에 의해 1979년 완전 박멸되었다는 선언이 나왔는데 최근에는 이게 바이오 테러나 생화학전에 이용될 소지가 크다고 하죠? 박멸되었다고 생각했기에 치료약이 충분치 않아 의외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참 인간이라는 것이 지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런 자료들을 보면서 오래전의 일이지만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것이 참 변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구만 달라져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의 수준만 있을 뿐, 거기서 거기라는 거죠. 자연주의 운운하지만 그들의 인식은 구한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orderclick=JAc&sntn_id=7410&Kc=KDBLCNbooknews

by 블루아이즈 | 2013/08/03 17:58 | 트랙백 | 덧글(4)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