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죽은 놈도 살려내고, 핏덩이도 장정으로: 조선시대 병역비리

 

 
 
조선시대 병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는 것이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이 있습니다. 황구첨정이란 아직 군역으로 끌려가지 않을 어린 아이에게 군역을 물려 세금을 추징하는 것이고(황구黃口는 아직 성인 장정이 되지 않은 어린이를 말합니다) 백골징포는 이미 죽은 사람을 죽지 않은 것으로 조작해 군포를 물리는 것이고, 족징과 인징이란 군역을 물지 않기 위해 도망간 사람의 군역이나 세금을 그 친척이나 이웃에게 물리는 것입니다.

 
사실 대표적인 것만 해서 저렇지 자세하게 따지고 들면 더 많이 있습니다. 세금 걷어내는 방법이란 참 다양하거든요. 백골징포만 해도 60세가 넘어 군역이 면제된 사람을 장부를 조작해 그보다 적은 나이로 만들어 군포를 걷는 강년채(降年債)가 있고, 아예 죽은 사람에게서 살아생전 체납한 세금이 있다며 거둬가는 물고채(物故債)도 있습니다. 이러니 후기 삼정의 문란으로 난리가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죠.
 


원래 조선에서는 16세부터 60세까지 남자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지게 했는데 이 연령대의 남자들이 죄다 군대를 가면 농사는 누가 짓나요? 그래서 군사 1명에 보인 2~3명을 둬서 그 2~3명이 병사 1명을 먹여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러기 위한 것이 바로 군포
였지요. 이것은 일 년에 베 2(초기에는 1)로 이것만이라면 그다지 사는 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요.

문제는 당시 군대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데다가(군대에 의무병이 생긴 건 근대 이후, 그전에는 의사 없는 곳에서는 그냥 죽어야 했고, 수군은 병들면 그대로 바다에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수군이나 시위 등 군기가 센 병종의 경우 멀쩡하게 갔다가 귀신이나 불구가 되어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에서 연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장기요양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니 웬만하면 군대 빠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면 이상한 거죠. 그래서 평시에 남는 잉여를 국가 재정으로 바꾸기 위한 방군수포나 대역납포 같은 제도를 악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난리도 아니게 된 거죠.

 
돈을 바치면 군역이 면제되니 기술이 필요한 병종 또한 이런 방법으로 헐역(歇役)을 받았습니다. 헐역이란 나이가 차서 병역면제가 되는 것인데, 원래는 불가능했습니다만 지방 수령들이 군역을 작성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아전들이 돈을 받고 빼버리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다 보니 군대의 질은 땅바닥을 기게 되어버린 겁니다. 거기다 단순히 군대가 약해진 정도라면 문제가 아닌데, 조선시대 관리를 보좌하던 아전들은 공식적인 급료가 없었기에 세금 받은 거에서 좀 떼어다가 자기가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떼어먹다 보면 사람 욕심이 더 크게 떼어먹고 싶어지죠.
 
그래서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떼어먹다 보니 정작 중앙에 바칠 세금이 없는 겁니다. 나라에서 조사한 군역자는 대충 나오는데 그보다 더 떼어먹었으니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면 어쩔까요? 덜 떼어먹을까요? 아니죠. 그래서 나온 게 죽은 놈도 살려보고 핏덩이도 장정으로 바꿔버리는 기술입니다. 자고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니까요. 이러다 보니 그 참상은 말로 못할 정도여서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갔을 때 군포와 관련된 비리를 직접 목격하고 그와 관련한 비극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제목의 시로 남겼습니다.
 
蘆田少婦哭聲長[노전소부곡성장]
哭向懸門呼穹蒼[곡향현문호궁창]
夫征不復尙可有[부정부복상가유]
自古未聞男絶陽[자고미문남절양]
舅喪已縞兒未조[구상기호아미조]
三代名簽在軍保[삼대명첨재군보]
薄言往소虎守혼[박언왕소호수혼]
里正咆哮牛去조[이정포효우거조]
 
朝家共賀昇平樂[조가공하승평락]
誰遣危言出布衣[수견위언출포의]
磨刀入房血滿席[마도입방혈만석]
自恨生兒遭窘厄[자한생아조군액]
蠶室淫刑豈有辜[잠실음형기유고]
민건去勢良亦慽[민건거세량역척]
生生之理天所予[생생지리천소여]
乾道成男坤道女[건도성남건도녀]
선馬분豕猶云悲[선마분시유운비]
況乃生民恩繼序[황내생민은계서]
豪家終歲奏管弦[호가종세진관현]
粒米寸帛無所捐[입미정백무소연]
均吾赤子何厚薄[균오적자하후박]
客窓重誦시鳩篇[객창중송시구편]
 
내용을 살펴보자면 웬 젊은 아낙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내용을 보니 시아버지는 삼년상도 벌써 지났고, 아이는 아직 배냇저고리도 못 벗은 간난쟁이인데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이까지 죄다 군적에 오른 겁니다. 이러니 세금 부담을 어떻게 해요? 그래서 억울하다고 관청에 가니 문 앞에서 하소연도 못 해보고 쫓겨나고 세금 걷어가는 이정은 농사지을 소까지 끌고 가버립니다.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남편이 방에 들어가 자기 양물을 자기 손으로 잘라낸 겁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이 난리를 겪는다.”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러니 아낙이 울지 않을 수가 있나요?
 
이런 비리의 고리는 조선 사회를 아주 꽁꽁 묶어놔 쉽게 처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양반들은 지방관료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받는 게 일상이었고, 아전은 아전대로 세금에서 자기 먹을 것을 떼다 보니 얼마나 해먹을지는 그야말로 자기 생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결국 당하는 건 순리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죠. 율곡선생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는데, 사실 이건 임진왜란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이런 군역에 대한 폐단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조 17 16 1 22 2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없는 군대를 늘리거나 만든다기보다, 있는 군대를 정비하거나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자는 겁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워낙에 군역이 제멋대로이다 보니 백성은 백성대로 고달프고, 군대는 군대대로 곪아 나갔으니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십만양병설은 기득권들의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죠. 떼먹는 건 아전이라면서 왜 양반들이 반대하냐고요? 먹으면 혼자 먹나요?
 
병역 회피는 군포 대신 뇌물 먹이고 빠져나오는 것도 있지만 학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향교인데요. 지금도 그렇지만 대학 가면 군대가 연기되죠?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로 성균관이나 향교의 학생들은 병역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돈 좀 있는 양인들이 이 향교에 이름을 넣어 병역을 면제받는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조선시대에 교육받는 것은 천민만 아니면 가능했으니 이런 편법도 가능했던 거죠. 덕분에 인조 때에만도 향교에 교생이 공식적으로 4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이걸 해결하기 위해 낙강충군제를 마련해 시험을 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군대에 보내는 방법을 모색했지요. 그러나 이것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애시당초 양반들은 시험을 보나 안 보나 군역에서 면제가 되는 것이었고, 양반이 아니라도 향교에 다닐 사람이면 부유하다는 건데, 수령이나 교관에게 뇌물을 주고 시험을 회피하는 사례가 나왔거든요. 심지어 정부에서 조차 납율면강제(納粟免講制)라는 이름으로 돈을 내고 시험을 면제받는 제도를 재정 확보의 수단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병역비리와 그로 인한 폐단들은 결국 조선을 갉아먹어 조선 멸망에 부채질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도 이런 폐단이 내려오는 듯해서 어쩐지 조금 씁쓸해집니다.
 
[역사/문화]  조선의 속사정
권우현 | 원고지와만년필
2013.04.15

알고 보면 지금과 비슷한 '조선의 속사정'
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만우절이?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였다고? 애연자와 혐연자의 담배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노비에서 왕까지, 조선을 이루었던 모든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진정한 뒷담화.

http://news.kyobobook.co.kr/comma/openColumnView.ink?orderclick=JAc&sntn_id=7475&Kc=KDBLCNbooknews

by 블루아이즈 | 2013/08/17 20:4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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